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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자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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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다사자 작전은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계획했던 상륙 작전이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 종결을 위해 상륙 작전을 고려했으나, 독일 해군의 상륙 작전 수행 능력 부족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실패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작전 준비 과정에서 독일군은 상륙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지선을 개조하고 잠수 전차, 부유 전차 등 특수 장비를 개발했다. 영국은 독일의 침공에 대비하여 향토방위대를 조직하고, 레이더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며, 1974년 워게임 결과 독일군이 제공권을 확보하고 상륙에 성공하더라도 보급 부족으로 항복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바다사자 작전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지만, 독일의 영국 점령 계획과 관련된 정보들이 존재하며, 동아시아 및 현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교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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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사자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초기 독일 계획
초기 독일 계획
명칭바다사자 작전 ()
시기1940년 9월 (계획)
장소노르망디, 벨기에 해안, 영국 해협, 영국 해안
목표추축국에 대한 군사 작전 기지로서의 영국 제거
결과작전 취소 및 독일, 이탈리아, 기타 추축국 군대를 독소 전쟁으로 전환
관련 전투영국 본토 항공전
주요 참가국나치 독일
영국
배경
목적영국을 항복시키고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다.
계획
초기 계획1940년 7월 25일 육군 제안, 켄트에서 도싯, 와이트 섬, 데번 일부 지역에 상륙하는 것을 구상
수정 계획이스트서식스 주와 서부 켄트의 4개 상륙 지점으로 축소
실행
실행 주체OKW
실패 원인영국 해군의 강력한 저항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의 패배
상륙 장비 부족
영향
결과작전 취소 및 병력 재배치
독일의 대영국 전략 변화
참고
관련 문서http://ww2db.com/doc.php?q=316 퓌러 지시 16호, 1940년 7월 16일
추가 정보http://www.bbc.co.uk/history/worldwars/wwtwo/invasion_ww2_01.shtml BBC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영국 위협

2. 배경

1939년 9월, 독일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폴란드와 프랑스 및 영국 동맹을 맺고 있었고,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5] 1940년 5월,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을 개시하여 됭케르크 전투에서 영국군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점령했다.

영국 내에서는 이탈리아를 중재로 한 평화 협상론이 대두되었으나, 윈스턴 처칠 총리의 강경한 항전 의지로 인해 무산되었다. 6월 4일, 처칠은 국회에서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연설을 통해 항전 의지를 표명했다.

프랑스 점령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 종결을 원했으나, 처칠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대영 전략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육군과 해군 모두 상륙용 주정과 같은 상륙용 장비가 부족했다. 당시 사단 규모 이상의 상륙 능력을 갖춘 국가는 일본뿐이었다.[9]

독일 해군 (크리그스마리네)은 영국 해협 항구가 자국의 통제를 받게 될 가능성을 인지하고, 에리히 레더 대제독은 한스위르겐 라이니케에게 영국 상륙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라이니케는 5일간의 연구 끝에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7]


  • 상륙 및 접근 지역에서 영국 해군 제거 또는 봉쇄
  • 영국 공군 제거
  • 해안 지역의 모든 영국 해군 부대 파괴
  • 영국 잠수함의 상륙 함대 공격 방지


1939년 11월, 루프트바페 정보국장 요제프 "베포" 슈미트는 영국 봉쇄에 대항하여 영국 무역 마비, 항구 공격 등을 제안했다.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는 이 제안을 고려했고, 11월 29일 히틀러의 "지침 제9호"는 해안 확보 후 ''루프트바페''와 ''크리그스마리네''가 해상 기뢰로 영국 항구를 봉쇄하고, 선박과 군함을 공격하며, 해안 시설과 산업 생산에 대한 공습을 가하도록 명시했다.[8]

1939년 프랑스 주둔 영국군


1939년 12월, 독일 육군은 자체 연구 보고서를 발행하고, 저지대 국가 항구에서 북해를 건너 이스트앵글리아에 10만 명의 보병을 상륙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크리그스마리네''는 영국 해군 본토 함대와 맞설 수 없다고 보고, 병력 수송 선박 조직에 1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헤르만 괴링은 합동 작전의 성공을 위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상륙 작전을 거부해야 한다고 답신했다.[9]

1940년 여름,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믿고, 특정 날짜를 유력한 시기로 연구했다.[76] 영국은 광범위한 방어를 준비했고, 처칠은 "대침공 공포"가 유용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았다.[77] 그러나 그는 위협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7월 10일 전쟁 내각에 침공 가능성은 무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77]

독일군은 침공 시뮬레이션을 촬영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1940년 9월 초, 한 팀이 벨기에 항구 앤트워프에서 가짜 포격 속에서 바지선에서 탱크와 군대가 상륙하는 장면을 촬영했다.[78]

8월 초, 독일 사령부는 침공을 9월 15일에 시작하기로 합의했지만, 해군의 일정 변경으로 9월 20일로 늦춰졌다. 9월 14일 회의에서 히틀러는 공중 우세가 아직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침공을 계속할지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9월 16일, 괴링은 새로운 공습 단계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79] 1940년 9월 17일, 히틀러는 작전 연기를 명령하고, 침공 함대의 분산을 명령했다.[79]

이 연기는 영국 해안 상륙 시도와 격퇴 소문과 일치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이 불타는 기름을 사용했다는 허위 보고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지만, 양국 모두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저자 제임스 헤이워드(James Hayward (writer))는 "실패한 침공" 소문 유포가 영국의 흑색 선전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제안했다.[80]

1940년 10월 12일, 히틀러는 다른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는 지침을 내렸다. 바다사자 작전 준비는 계속되었고, 1941년 봄에 침공을 재고할 경우 새로운 지침을 내릴 것이었다.[82] 1941년 5월 1일, 새로운 침공 명령이 내려졌지만, 해군 기지 사령관들에게는 기만 작전이라고 통보되었다.[81]

블리츠 기간 동안 영국의 폭격이 강화되면서 히틀러는 1940년 12월 18일 지침 제21호를 발부하여 베르마흐트에게 소련 침공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Seelöwede는 중단되었고, 재개되지 않았다.[82] 1941년 9월 23일, 히틀러는 모든 바다사자 작전 준비를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마지막 바지선이 무역으로 반환된 것은 1942년이었다. 히틀러가 바다사자에 대해 기록한 마지막 명령은 1944년 1월 24일이었다.[83]

2. 1. 히틀러의 구상

아돌프 히틀러프랑스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영국에 대한 상륙 공격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한 평화를 희망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26일, 영국 외무 장관 핼리팩스 경이 이탈리아를 중재로 평화 교섭을 제안했지만, 윈스턴 처칠 수상을 비롯한 주전파는 철저 항전을 주장했고, 독일은 꼼짝 못하게 되었다.[11]

1940년 6월 30일, OKW 주최 회의에서 요들 작전부장은 대영 전략으로 외교 교섭, 경제 봉쇄, 공포 폭격, 침공, 간접 접근, 방어 전략 등 6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OKH(육군 최고사령부)에 소련 침공 작전 연구를 지시했고, 8월 중순까지 영국 본토 상륙 작전(바다사자 작전)의 구체적인 작전 계획 수립과 준비를 완료할 것을 명령했다.[139]

3. 작전 계획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성공 이후, 독일프랑스영국으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았다. 히틀러는 "전쟁 수행 지침 제6호"를 통해 영국에 대한 공중 및 해상전을 위한 기지 확보를 계획했다.[6]

영국 해협 항구가 독일 해군(''크리그스마리네'')의 통제를 받게 될 가능성에 대비하여, 에리히 레더 대제독은 상륙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1939년 11월, OKW는 영국 봉쇄를 고려했고, 히틀러는 "지침 제9호"를 통해 해상 봉쇄와 공습을 명시했다.[8]

1939년 12월, 독일 육군은 자체 연구 보고서를 발행하여 이스트앵글리아에 10만 명의 보병을 상륙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해군은 영국 해군 본토 함대에 맞설 수 없다고 보고, 병력 수송 선박을 조직하는 데 1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는 합동 작전을 거부하며, 이미 승리한 전쟁의 마지막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9]

프랑스 공방전에서 독일이 승리하고 영국 해협 연안을 장악하면서, 대영 전략은 다시 논의되었다. 1940년 6월 30일, OKW 주최 회의에서 알프레트 요들 작전부장은 대영 전략 선택 목록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외교 교섭, 경제 봉쇄, 공포(공포 폭격), 침공, 간접 접근, 방어 전략 등이 포함되었다.

해군은 노르웨이 전역으로 인한 함정 손실 때문에 상륙 작전에 소극적이었으며, 경제 봉쇄와 간접 접근을 지지했다. 당시 대서양에서 상시 전개 가능한 U보트는 15척 정도[138]로, 경제 봉쇄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했다.

공군의 헤르만 괴링은 공포 폭격으로 영국의 항전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육군은 상륙 작전을 지지했으나, 해군과의 의견 차이로 인해 격론이 벌어졌다.

히틀러는 영국과의 외교 교섭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공군에 도시 폭격을 금지했다. 7월 19일, 히틀러는 "평화인가 전면적 파괴인가"라는 협박조의 국회 연설[139]을 했지만, 명확한 선택은 하지 않았다.

해군 작전부의 쿠르트 프리케 소장은 영국 본토 남동부에 좁은 정면으로 상륙하는 작전 안을 제시했다. 반면, OKH는 7월 13일, 수송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8곳에 13개 사단(26만 명)을 상륙시키는 안을 제시했다.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총통 지시 제16호를 발령하여, 바다사자 작전 준비를 8월 중순까지 완료하도록 명령했다.

해군과 육군은 상륙 지점을 두고 격론을 벌였으나, 히틀러의 개입으로 수송 능력에 맞는 계획을 협력하여 만들도록 지시했다.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격렬한 논쟁 끝에, 8월 30일 판 바다사자 작전 안이 결정되었다.

3. 1. 작전 목표 및 조건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영국 상륙 작전 준비를 시작하라는 총통 지시 제16호를 발표했다. 그는 "영국은 절망적인 군사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협할 의사를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영국에 대한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필요하다면 실행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이 작전의 암호명은 ''Seelöwe'', 즉 "바다사자"였다.[12][13]

히틀러의 지시는 침공을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14]

  • 영국 공군(RAF)은 "사기가 저하되고, 실제로 독일의 도강에 반대하는 어떠한 공격적인 힘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도록" 해야 한다.
  • 도강 지점에서 영국 해협은 영국 해군의 기뢰를 제거해야 하며, 도버 해협은 독일 기뢰로 양쪽 끝을 봉쇄해야 한다.
  • 점령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해안 지역은 중(重)포병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 영국 해군(Royal Navy)은 북해지중해에서 충분히 교전하여 도강에 개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영국 본토 함대는 공습과 어뢰 공격으로 손상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바다사자 작전의 성공 책임을 해군 총사령관 레더와 공군 총사령관 괴링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작전에 열의가 없었고, 사실상 반대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15] 또한, 지시 제16호는 연합군 원정군 최고 사령부(SHAEF)와 같은 통합 작전 사령부를 제공하지 않아 육군, 해군, 공군이 협력하여 작전을 계획, 조정, 실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16]

3. 2. 상륙 계획

1940년 8월 30일에 채택된 최종 전투 서열은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파가 4개의 해변 지역에 상륙하는 것을 구상했다.[65] 제1파 상륙군은 3개의 종대로 나뉘어 해협을 건널 예정이었다. 상륙 지점은 켄트서식스 해안으로, 포크스턴, 라이, 헤이스팅스, 벡스힐온시, 이스트본, 브라이튼 등이었다.[65]

상륙 지점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었다.

상륙 지점담당 부대출발 지점
포크스턴 서쪽 (B)제13군단 (제17, 제35 보병 사단), 제7 항공 사단 (공정 강하)로테르담, 앤트워프, 오스텐데, 덩케르크, 칼레
라이, 헤이스팅스 동쪽 (C)제7군단 (제7 보병 사단, 제1 산악병 사단)상동
벡스힐온시, 이스트본 (D)제38군단 (제26, 제34 보병 사단)불로뉴쉬르메르, 르아브르, 셰르부르
브라이튼 (E)제8군단 (제8, 제28 보병 사단, 제6 산악병 사단)상동



제2파에는 4개 기갑 사단(4, 7, 8, 10), 2개 자동차화 보병 사단(20, 29), 2개 보병 사단(12, 30), 그로스도이칠란트 자동차화 보병 연대, LSSAH 사단 (여단 규모)이 포함되었다. 제3파에는 6개 보병 사단 (15, 24, 45, 58, 78, 164)이 포함되었다.

상륙 지점 B와 C는 제16군 (에른스트 부쉬 상급 대장) 관할이었고, 상륙 지점 D와 E는 제9군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 대장) 관할이었다.

공군은 상륙 당일(S데이)에 상륙 지점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영국 해군의 방해에 대처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군은 사전에 항로 소해와 방어용 기뢰 지대 설치를 담당하고, S데이에는 상륙 부대의 수송 및 보호를 담당했다. 또한 S-3일 전후로 각종 견제 작전도 계획되었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보급항 (셰르부르 항) 확보가 문제였지만, 독일 육군은 항만 시설이 큰 람스게이트나 도버 등에 직접 상륙하길 원했지만, 해군의 반대로 계획에서 제외되었다. 선정된 상륙 지점 중 포크스턴에는 항구가 있었지만 규모가 작아 대규모 병력 보급에는 부적합했다.

제2파 상륙에는 제1파 상륙에 사용된 화물선, 개조 바지선, 예인선, 호위함정이 필요했으며, 아마 수리도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해군은 10일 후에 더 적은 규모의 상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육군 수뇌부는 좁은 상륙 지점 전선에서 영국군에 봉쇄될 가능성, 보급에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 항만을 신속하게 점령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배제할 수 있는지 등 심각한 우려가 해소되지 않아 이 작전안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공수 부대도 상륙 작전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수송에 사용하는 Ju-52 수송기가 부족하여 제한적인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다.[139] Ju-52의 생산은 낮은 우선 순위만 주어졌고, 9월 중순의 작전 예정 시기에는 약 220기의 Ju-52와 50기 정도의 DFS-230 글라이더가 사용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139] 이는 나중에 실시된 크레타 섬 침공에 사용된 기재 수의 절반 정도이다.

4. 작전 준비

1940년 여름, 영국 육군 최고 사령관의 참모진은 독일 침공군의 가장 유력한 상륙 지점으로 이스트 앵글리아와 동부 해안을 고려했다. 이는 항구와 자연 항구를 점령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포츠머스의 해군력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0년 8월 말부터 프랑스 항구에 침공 바지선이 축적되면서 남부 해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따라서 주요 국방군 이동 예비대는 런던 주변에 배치되어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켄트 또는 에식스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1940년 6월, 대 프랑스전의 향방이 결정되자, 독일 육군과 해군은 영국 본토 상륙 작전 연구를 재개했다.

6월 30일, OKW 주최로 상황 검토 회의가 열렸고, OKW의 요들 작전부장이 제출한 대영 전략 선택 목록에는 다음 6가지가 제시되었다.


  • 외교 교섭(강화)
  • 경제 봉쇄
  • 공포(공포 폭격)
  • 침공
  • 간접 접근(지브롤터, 이집트 등 영국 본토 이외의 해외 영토 공격)
  • 방어 전략(영국을 방치하고, 동원을 대폭 해제하여 국내 경제 기반 강화)


해군은 4월 노르웨이 침공(베저 작전)으로 많은 함정이 손실되거나 손상되었고, 영국 본토 함대에 비해 크게 약했기 때문에, 적어도 1940년 중 상륙 작전 실시는 반대했다. 해군 작전부는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장비 수송 능력이 갖춰지는 것은 빨라도 8월이며, 영불 해협의 해양 기상 조건으로 상륙 작전 실시가 가능한 것은 9월 말까지이며 10월 이후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해군은 경제 봉쇄와 간접 접근을 지지했다. 그러나 당시 대서양에서 상시 전개할 수 있는 U보트의 수는 15척 정도[138]였으며, 경제 봉쇄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했다.

공군의 괴링은 경제 봉쇄는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상륙 작전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며, 이미 덩케르크에서 패배하여 약화된 영국은 공군이 네덜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포 폭격으로 항전 의지를 꺾어 평화 교섭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육군 내에서는 경제 봉쇄나 공습만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고, 영국 본토가 장래 대륙 반격의 기지가 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에 상륙 작전 지지자가 많았다.

히틀러는 영국과의 외교 교섭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공군에게 도시 폭격을 금지했지만, 그 외에 독일 측에서 평화 교섭을 위한 외교 노력이 있었던 기록은 히틀러의 "평화인가 전면적 파괴인가"라는 협박조의 7월 19일 국회 연설[139] 밖에 없었다.

해군 작전부(SKL)의 쿠르트 프리케 소장이 정리한 해군의 상륙 작전 안은, 영국이 덩케르크에서의 타격으로부터 회복되기 전에 가능한 한 조기에 영국 본토 남동부에 좁은 정면으로 상륙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OKH에 의한 상륙 작전 안은 7월 13일에 히틀러에게 제시되었지만, 해군 정보가 없고 수송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람스게이트에서 라임만까지 8곳에 13개 사단(26만 명)을 2, 3일 사이에 상륙시키고, 제2파를 포함하면 총 40개 사단을 상륙시킨다는 계획이었다.

7월 16일,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16호를 발령하여 영국 본토 상륙 작전(바다사자 작전)의 구체적인 작전 계획 수립과 그 준비를 8월 중순까지 완료할 것을 명령했다.

상륙 작전 안은 수송 능력에 맞는 제한된 상륙 지점을 주장하는 해군 안과, 광범위한 상륙 지점을 주장하는 육군 안으로 나뉘어 격론이 벌어졌지만, 히틀러가 개입하여 수송 능력에 맞는 계획을 협력하여 만들도록 지시했다.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OKH, SKL, OKW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지만, 최종적으로 수송 능력을 고려하여 타협하여 결정된 것이 8월 30일 판 바다사자 작전 안이다.

작전 실행 예상 시기는 9월 중순이었다. 상륙 작전 첫날을 S데이로 정하고, 상륙 선단의 항로를 영국 수상 부대의 개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사전에 방어용 기뢰 지대 설치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S-10일에 작전 실행을 결정해야 했다.

제1파 상륙 부대는 S데이 이른 아침에 다음 지점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 상륙 지점 B: 포크스턴 서쪽
  • 제13군단 (제17, 제35 보병 사단) 제7 항공 사단의 공정 강하
  • 상륙 지점 C: 라이, 헤이스팅스 동쪽
  • 제7군단 (제7 보병 사단, 제1 산악병 사단)
  • 상륙 지점 D: 벡스힐온시, 이스트본
  • 제38군단 (제26, 제34 보병 사단)
  • 상륙 지점 E: 브라이튼
  • 제8군단 (제8, 제28 보병 사단, 제6 산악병 사단)


제2파에는 4개 기갑 사단(4, 7, 8, 10), 2개 자동차화 보병 사단(20, 29), 2개 보병 사단(12, 30), 그로스도이칠란트 자동차화 보병 연대, LSSAH 사단 (여단 규모)이 포함되었다.

제3파에는 6개 보병 사단 (15, 24, 45, 58, 78, 164)이 포함될 예정이었다.

상륙 지점 B와 C는 제16군 (에른스트 부쉬 상급 대장) 관할로, 로테르담, 앤트워프, 오스텐데, 덩케르크, 칼레에서 출발한다. 상륙 지점 D와 E는 제9군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 대장) 관할로, 불로뉴쉬르메르, 르아브르, 셰르부르에서 출발한다.

공군은 S데이에 상륙 지점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영국 해군의 방해에 대처하는 임무를 맡았다. 해군은 사전에 항로 소해와 방어용 기뢰 지대 설치를 담당하고, S데이에는 상륙 부대의 수송 및 보호를 담당하며, S-3일 전후로 각종 견제 작전도 계획했다.

육군 수뇌부는 좁은 상륙 지점 전선에서 영국군에 봉쇄될 가능성, 보급에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 항만을 신속하게 점령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영국 해군의 방해를 배제할 수 있는지 등 심각한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남아, 이 작전안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상륙 작전에 필요한 구체적인 장비와 관련해서는 하위 섹션인 "상륙정 부족과 즉흥적인 해결책"과 "특수 장비 개발"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4. 1. 상륙정 부족과 즉흥적인 해결책

독일에서는 그 이전까지 영국의 본토 상륙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군이나 해군 모두 상륙용 주정과 같은 적전 상륙용 장비는 연구 시제품 정도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당시 사단 규모 이상의 적전 상륙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대발동정 등을 다수 장비하고 실제로 1937년의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적전 상륙을 실시한 일본뿐이었다.[138]

상륙 작전 부대의 수송은 노르웨이 침공(베저 작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군이 담당했다. 1940년 6월 중순, 상륙 작전 계획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상륙 작전 능력 확보는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히틀러는 해군에 최우선 순위로 준비를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이 목적을 위해 크고 작은 총 174척의 화물선이 징발되었다.

상륙 부대의 제1제대는 1척당 약 75명으로 해군의 소해정, R보트, 기타 보조 함정이나 어선에 분승하여 상륙 지점 앞바다에서 육군의 39형 강습 보트(보병 6명과 MG34 기관총 1기 탑재, 엔진 부착)로 갈아타고 상륙했다. 제2제대(미리 승선항에서 승선 완료)와 앞바다의 화물선에서 부대와 물자를 양륙하는 데에는 라인강과 발트해 연안에서 사용되던 바지선을 개조한 것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1940년 6월에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에서 바지선 총 2,945척이 징발되었다.

대부분의 바지선은 평저선이라 병력과 기재 운반용으로 개조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징발된 바지선의 약 3분의 2는 자력 추진 능력이 없었고, 자력 추진이 가능한 것도 외해에서의 사용에는 추력이 부족하여 저속이었다. 또한 화포, 전차 등을 탑재하기에는 강도가 부족했고, 상륙 시 선수 부분이 앞으로 넘어지는 도판(램프)의 개조도 필요했다. 해군 수뇌부는 바다사자 작전에 소극적이었지만, 작전 준비를 위해 이러한 바지선의 개조 작업은 1940년 7월부터 민간 조선소, 해군 조선부, 15개의 육군 건설 대대가 정력적인 돌관 작업을 실시하여, 9월의 작전 예정 시기까지는 계획된 개조 작업이 완료되었다.

개조 바지선이 해협을 건너기 위해 해군은 426척의 예인선을 마련했고, 예인선 1척은 자력 추진 바지선 1척과 비추진 바지선 1척을 예인할 계획이었다.

개조 바지선의 도판은 병력 양륙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차량 양륙에는 (총탄이 오가는 가운데) 승무원에 의한 10분 이상의 수작업이 필요했다. 육군은 엄체호 등 방어 거점 제압에는 전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수 전차와 부상 주행 전차의 개조도 이루어졌다. 잠수 전차는 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의 차체를 수밀화하여 슈노켈을 설치하고 수심 15미터 이하의 해저를 최대 속도 6km로 자력 주행하는 것이다. 4개 대대, 약 250대가 준비되었다. 잠수 전차용으로는 특별한 개조 바지선이 필요했다. 부상 주행 전차는 비교적 차중이 가벼운 2호 전차의 차체 양 측면에 거대한 부유물을 부착하고 차체 후부에 추진용 프로펠러를 설치하여 수면을 최대 속도 6km로 자력 주행하는 것이다. 부유물은 장갑 처리되지 않아 기관총탄에 구멍이 뚫리므로 상륙할 때까지 피탄되지 않아야 했다. 부상 주행 전차는 52대가 준비되었다.

상륙 작전에는 공수 부대도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수송에 사용하는 Ju-52는 저지대 국가에서의 작전에서 다수 손실을 입어 충분한 수가 없었다. Ju-52의 생산은 낮은 우선 순위만 주어졌고, 9월 중순의 작전 예정 시기에는 약 220기의 Ju-52와 50기 정도의 DFS-230 글라이더가 사용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나중에 실시된 크레타 섬 침공에 사용된 기재 수의 절반 정도이다.

4. 2. 특수 장비 개발

1940년 6월, 프랑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독일 육군과 해군은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을 위한 특수 장비 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독일은 상륙용 주정과 같은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을 제외하면 사단급 상륙 작전 능력을 갖춘 국가는 거의 없었다.

장비 종류상세 설명비고
잠수 전차 (Tauchpanzer)3호 전차4호 전차를 개조하여 수심 15m까지 잠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차체를 수밀화하고 슈노켈을 설치하여 해저에서 최대 6km/h로 주행할 수 있었다.4개 대대, 약 250대 준비. 특별 개조된 바지선 필요.[55]
부유 전차 (Schwimmpanzer)2호 전차의 양 측면에 부유물을 부착하고 후부에 추진용 프로펠러를 설치하여 수면에서 최대 6km/h로 주행할 수 있도록 했다. 부유물은 장갑 처리되지 않아 기관총탄에 취약했다.52대 준비[55]
상륙 교량 (Seeschlange)독일 육군이 자체 개발한 휴대용 상륙 교량으로, "바다 뱀"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연결된 모듈을 예인하여 임시 부두 역할을 하도록 했다. 정박된 선박에서 화물을 직접 도로에 하역하거나 대형 붐을 통해 차량으로 옮길 수 있었다.1941년 가을,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성공적으로 시험. 헤라클레스 작전에 사용될 예정.[54]
기타 장비



6월 30일, OKW 회의에서 요들 작전부장은 대영 전략 선택 목록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외교 교섭, 경제 봉쇄, 공포 폭격, 침공, 간접 접근, 방어 전략이 포함되었다.

5. 영국 측의 대응

1940년 여름, 영국 국민과 미국인들은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믿었으며, 영국은 광범위한 방어를 준비했다.[76] 윈스턴 처칠은 "대침공 공포"가 "모든 남녀를 높은 수준의 준비 태세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았다.[77] 7월 10일, 처칠은 전쟁 내각에 침공 가능성은 무시할 수 있다고 조언했고, 8월 13일에는 영국이 훨씬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존 딜 장군을 제치고 나침반 작전을 시작하여 3개 전차 연대를 포함한 부대를 중동으로 파견하여 이탈리아군에 대항하는 작전을 지원했다.[77]

윈스턴 처칠이 1940년 9월 8일 폭격 피해를 입은 런던 이스트 엔드 지역을 방문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 수상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1940년 5월부터 징병 적령자를 제외한 무급 자원 봉사자인 향토방위대가 조직되었다. 향토방위대에 대한 지원은 높았지만, 덩케르크 철수 과정에서 육군 부대가 장비를 대량으로 잃었고, 본토 정규군의 장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향토방위대에 제공되는 장비는 빈약했다.

영국 육군은 9월에 23개 보병 사단, 2개 기갑 사단, 4개 영연방국 보병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들 중 절반 가까이는 인원과 장비 모두 충족률이 절반 이하 수준으로 숙련도가 낮았고, 프랑스 침공에서 다수의 하사관과 장교를 잃었기 때문에 신병 훈련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 공군은 체인 홈 레이더를 사용한 조기 경보 시스템을 남부에 전개했는데, 이는 당시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된 것이었다. 독일군은 덩케르크 철수 때 영국 본토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전파의 존재를 알아챘지만, 체인 홈의 능력 등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채로 항공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본국 함대로서 전함 3척, 순양전함 2척, 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3척, 경순양함 14척, 구축함 89척, 잠수함 26척 등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스카파 플로우, 로사이스 등 스코틀랜드 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상륙을 계획하고 있던 남부에는 플리머스에 전함 리벤지, 경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포츠머스에 구축함 8척, 잠수함 2척, 도버에 구축함 3척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17]

5. 1. 영국군의 방어 전략

영국군은 독일군의 상륙 작전에 대비하여 다각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초기에는 독일군의 주된 상륙 지점으로 이스트 앵글리아와 동부 해안을 예상했다. 이에 따라, 주요 국방군 이동 예비대를 런던 주변에 배치하여 켄트 또는 에식스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7월부터 동부와 남부 해안의 상륙 예상 지점 약 40곳에 방어 시설 및 해중 장애물 설치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9월까지 그 진척은 미미한 수준이었다.[17] 이는 덩케르크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 육군 부대의 장비 손실과 본토 정규군의 장비 부족 문제와 맞물려, 향토방위대에 대한 장비 지원도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군은 9월 편성표상 23개 보병 사단, 2개 기갑 사단, 4개 영연방국 보병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는 인원과 장비 부족, 훈련 미흡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영국 공군은 체인 홈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 경보 시스템을 남부에 구축하여 독일군의 공습에 대비했다. 영국 해군은 본국 함대를 중심으로 전함, 순양전함,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등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상당수가 스카파 플로우, 로사이스 등 스코틀랜드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상륙을 계획한 남부 지역에는 제한된 수의 함정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아프베어(국방군 정보부)와 공군 정찰기를 통해 영국 측 방어 상황 정보를 수집하려 했으나, 스파이 침투는 실패하고 공군 정찰 역시 체계적이지 못해 상륙 예정 지역의 방어 태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6. 영국 본토 항공전

1940년 7월 초, 영국 해협에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이 선박과 항구를 공격하는 '운하 전투'(Kanalkampf)가 시작되면서 영국 본토 항공전의 막이 올랐다. 이는 영국 공군 전투 사령부를 방어 작전에 투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독일 공군의 광범위한 공습은 항공 승무원들에게 주야간 항해 경험을 제공하고 영국의 방어 태세를 시험하는 기회가 되었다.[21]

8월 13일,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RAF)을 파괴하고 대영 제국 상공의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 전역에 걸쳐 일련의 집중적인 공습(Unternehmen Adlerangriff, 독수리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영국 공군 기지 공격에서 런던 폭격으로 목표를 변경하면서 '독수리 작전'은 단거리 전략 폭격 작전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전략 변화의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 공군이 이 전략 변화로 인해 공중전에서 승리하거나 제공권을 확보할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한다.[22]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독일 공군이 공중전에서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영국 공군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붕괴 직전에 있지 않았다고 반박한다.[23] 또한, 독일군이 기상 악화 이전에 제공권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24] 영국 공군 전투 사령부를 독일 공군이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영국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더라도 북쪽으로 철수하여 재집결한 후, 독일군의 침공 시점에 맞춰 다시 배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바다사자 작전은 어떤 식으로든 실패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25]

1940년 6월 30일, 헤르만 괴링은 제2항공함대 사령관 케셀링 원수와 제3항공함대 사령관 슈페를레 원수에게 해협 주변의 함선을 공격하고 요격하러 나오는 영국군 전투기를 격멸하도록 지시했다. 7월 독일군 폭격기 출격 총수당 손실률은 2.2%로, 지속 가능한 폭격 작전의 손실률(3%)보다는 낮았지만,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8월 1일, 항공전에 관한 총통 지령 17호를 발령하여 항공 우위 확보, 전투기 비행장, 전투기 보급 설비, 항공기 생산 공장, 항만 설비 공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도시 공습은 보류했다.

독일 공군은 총통 명령에 따라 8월 13일부터 항공 작전(독수리 작전)을 실시했다. 주된 목표는 영국 공군 전투기 부대를 격파하여 영국 본토 남부의 항공 우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며칠, 늦어도 몇 주 안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영국 본토 남부에는 더미 비행장을 포함하여 전투기 운용이 가능한 비행장이 많았고, 체인 홈(레이더망) 덕분에 요격기가 출격하는 경우가 많아 괴링의 예상만큼 쉽지 않았다. 저공 폭격 전문 부대인 제210폭격 그룹 등은 레이더 기지 공격 등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독일 측의 피해도 컸다. 8월 독일군 폭격기 출격 총수당 손실률은 5.7%에 달해 폭격 작전 지속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8월 25일, 히틀러는 베를린 야간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그동안 금지했던 군사 목표를 동반하지 않는 도시 공습을 허가하고, 런던 공습을 괴링에게 지시했다. 9월 7일부터 독일군은 런던 공습을 실시했지만, 주간 폭격은 큰 피해를 입어 9월 하순부터 런던을 포함한 도시 공습은 야간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영국 측의 야간 방공 능력은 취약했고, 독일군의 야간 폭격은 영국군보다 도시에 더 큰 피해를 입혔지만, 제공권 확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바다사자 작전이 예정된 9월 후반에도 항공전은 계속되었지만, 영국 본토 남부의 제공권 확보는 요원한 상황이었다.

7. 연기 결정과 그 이후

1940년 9월 17일,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 결과와 해군력 열세 등을 이유로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79] 이 연기는 영국 해안에 상륙하려던 독일군이 큰 피해를 보고 격퇴되었다는 소문과 맞물렸는데, 이는 영국과 독일 모두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미국 언론 등에 널리 보도되었다.[80]

1940년 10월 18일,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18호를 통해 1941년 봄에 바다사자 작전을 재개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동부 전선(소련 침공) 준비를 우선시했다.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21호를 발령하여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 준비를 공식적으로 명령했다.[82] 이후 독일군은 동부 국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바다사자 작전은 사실상 폐기되었다.[82]

8. 성공 가능성 평가

대다수의 군사 역사학자들은 바다사자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고 평가한다. 주요 실패 요인으로는 독일 공군(Luftwaffe)의 제공권 장악 실패, 해군력의 열세, 상륙 작전 준비 부족, 영국군의 방어 태세 등이 지적된다.


  • 독일 공군의 제공권 장악 실패: 헤르만 괴링 공군 총사령관은 침공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84] 아돌프 갈란트는 침공 계획이 진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86]
  • 해군력의 열세: 에리히 레더 해군 총사령관은 1941년 봄까지 침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90]
  • 상륙 작전 준비 부족: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독일이 수륙양용 부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93]
  • 영국군의 방어 태세: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96]


됭케르크 철수와 비교하여, 독일의 수륙 양용 계획은 "덩케르크 철수의 반대"라고 불리기도 한다.[96]

몇몇 역사학자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케네스 맥시는 독일이 덩케르크 철수 이전부터 신속하게 준비를 시작하고 영국 해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지만,[98] 실제로는 독일이 그러한 빠른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다.[99] 로버트 포르치크는 영국 해군이 독일 해군을 쉽게 압도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도전하며, 1974년 샌드허스트 바다사자 전쟁 게임의 결과와 유사한 평가를 내렸다. 그는 독일군이 켄트와 이스트서식스 상륙 해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영국군이 이들을 몰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주요 항구 접근 불가, 잠수함 공격으로 인한 수송선 손실 등으로 인해 2차 상륙이 어려워지고, 1차 상륙 부대는 런던을 위협할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치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데미얀스크 포켓의 사례를 들어 독일군이 항복하지 않고 버텼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1941년까지 버틴 후 영국 정부와 협상을 통해 철수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8. 1. 전후 워게임 결과

1974년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실시된 워게임에서는 Luftwaffede(독일 공군)가 1940년 9월 7일에 런던 폭격으로 주간 작전을 전환하지 않고, 동남부의 영국 공군 기지를 계속 공격했다고 가정했다.[113] 그 결과, 독일군은 영국 공군 전투기 격추에 대한 과장된 주장에 의존하여 1940년 9월 19일까지 영국 공군 최전선 전투력이 크게 감소했다는 잘못된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독일의 효과적인 제공권 장악이 곧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113]

게임에서 독일군은 1940년 9월 22일에 거의 모든 제1진 부대를 상륙시켰고, 영국군이 두 항구의 시설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크스톤과 뉴헤이븐을 점령하여 잉글랜드 남동부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영국 육군은 런던 남쪽 철도망의 폭격 피해로 인해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남동부로 부대를 이동시키는 데 지연되었지만, 뉴헤이븐과 도버 주변의 위치를 ​​유지하여 독일군의 사용을 막을 수 있었다. 영국 공군과 독일 공군은 첫날에 가용 전력의 거의 1/4을 잃었고, 그 후 독일 지휘부는 영국 공군력이 결국 붕괴될 지경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9월 23/24일 밤에 순양함구축함으로 구성된 영국 해군 함대가 로시스에서 해협에 도착하여 독일 수륙양용 상륙의 제2진과 제3진을 수송하는 대부분의 바지선을 요격하여 파괴했다. 이 바지선들은 결정적인 전차와 중포를 싣고 있었다. 제2진과 제3진이 없었기 때문에 상륙한 부대는 포병, 차량, 연료 및 탄약 공급의 예비 자원에서 차단되었고, 추가 증원을 받을 수 없었다. 장갑차와 포병을 갖춘 신규 정규군에 고립된 침공군은 6일 후에 항복해야 했다.[114]

1974년,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영국과 독일 양군의 관계자들을 모아 영국 본토 상륙 작전에 대한 모의 훈련(시뮬레이션)이 진행되었다. 독일군은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영국 해협을 기뢰로 봉쇄하여 바지의 안전을 확보하고 최초의 상륙이 성공했다는 조건으로 진행되었다. 시뮬레이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상륙 성공 후, 독일군은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내륙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GHQ 라인(상륙을 예상한 방어선)까지 지연전을 벌여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늦추려 했다. 독일군은 영국 공군에 의해 해상 수송이 방해받고, 장갑 부대의 부족으로 인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수 없었다. 확보한 시간을 이용하여 영국군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노인과 어린이로 구성된 향토 방위대를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동시에 초기 공세에서 피해를 입은 정규군을 재편성하여 전선에 복귀시켰다. 독일군이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며칠간 대치가 이어지다, 마침내 기뢰 지대를 돌파한 스캐퍼플로에서 출격한 영국 해군이 영국 해협에 도착한다. 독일군의 해상 수송은 파괴되고, 보급과 증원이 끊어졌다. 소모된 독일군은 항복을 강요받았고, 침공은 실패했다.

전사학자 로버트 포르치크는 이상의 샌드허스트에서의 평가는 당시 영국군이 독일군에 대해 육상전에서 거의 연전연패를 겪었던 점, 미성년과 노인으로 구성된 장비 빈약의 홈 가드, 취약한 연안 방비, 본토의 영국군 실태를 과대평가하고 있어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9. 독일의 영국 점령 계획

독일은 영국 점령 후, 런던, 버밍엄, 뉴캐슬, 리버풀, 글래스고, 더블린에 6개의 군정 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이었다.[125] 윈스턴 처칠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저택인 블레넘 궁전은 독일 점령 군정의 전체 본부로 사용될 예정이었다.[126] 독일은 오스왈드 모슬리와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친독 정부를 구성하려 했다.[127]

일부 자료에 따르면, 독일은 잉글랜드 남부만 점령하고, 스코틀랜드 독립, 아일랜드 연합 창설, 잉글랜드 서부 자치 등을 통해 영국을 분할하려는 구상도 가지고 있었다.[130]

윈저 공작SS 경비병 (1937년)


독일은 에드워드 8세를 왕위에 복귀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32][133] 많은 고위 독일 관료들은 윈저 공작이 나치 정부에 매우 동정적이라고 믿었다.[134]

프란츠 식스 (1940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나치 친위대(SS)는 프란츠 식스를 중심으로 ''존더판둥스리스트 G.B.''에 등재된 2,820명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30만 명이 넘는 영국 유대인들을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135] 또한 넬슨 기념탑을 베를린으로 옮기는 아이디어도 있었다.[136]

10. 한국의 관점에서 본 바다사자 작전

바다사자 작전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가상 시나리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한국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바다사자 작전은 강대국 간의 전쟁이 주변국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만약 독일이 영국을 점령했다면,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에서 더욱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국의 독립 운동과 해방 이후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둘째, 바다사자 작전은 국가 안보, 특히 제공권과 해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는 현대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 1.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

만약 바다사자 작전이 성공하여 영국 본토가 함락되고 영국 해군이 무력화되었다면, 일본 제국은 동남아시아 침공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지 않고 동남아시아의 자원 지대를 장악하려 했을 것이다.

10. 2. 현대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바다사자 작전의 실패는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제공권과 해군력의 중요성은 현대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동맹국과의 협력과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의 단합된 의지와 저항 정신은 국가 안보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참조

[1] 웹사이트 Führer Directive 16 http://ww2db.com/doc[...] 2014-03-17
[2] 뉴스 The German Threat to Britain in World War Two http://www.bbc.co.uk[...] BBC History 2017-05-07
[3] 웹사이트 Operation Sealion – History Learning Site http://www.historyle[...] 2017-05-07
[4] 웹사이트 BBC – WW2 People's War – A Last Appeal to Reason by Adolf Hitler http://www.bbc.co.uk[...]
[5] 서적
[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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